“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뤄라.”
그동안 듣고 배운 것을 한꺼번에 무너뜨리는 말이다. 이 말만 듣는다면 그는 틀림없이 게으르거나 무책임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 여러 차례 만나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그가 누구보다 책임감 있고, 삶에 진지하다는 것을 잘 알게 됐다.

‘어의곡 아티스트’ 이춘영 님 얘기다.
그의 말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
‘매사를 너무 쉽게, 섣불리 결정하지 말라.
신중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
그래야 후회를 적게 한다.’
내가 이해하는 뜻이다. 실제로 그와 여러 차례 대화하면서 매사에 신중한 태도를 보인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의 말에 날카로움이 담겨 있다는 느낌도 이런 깊은 생각의 결과로 보인다.
그는 개성있고, 창의력이 철철 넘치는 사람이다. 아티스트의 기질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어의곡 아티스트’라는 닉네임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춘영 님은 보는 이를 놀라게 하는 솜씨를 갖고 있다. 그의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솜씨를 칭찬한다. 어느 정도일까.
집안 거실에 있는 작품을 만나 보자.

▲ 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한 짐 되는 나무를 가져다 다듬어야 한다고.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애초
이런 모양으로 돼 있는 것을 깎았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아요.
저런 거 하나 만들려면 한 지게 가득 차는 나무를 짊어지고
힘들게 산을 내려와야 해요.”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까지 힘든 작업을 거친다. 멀쩡하게 산 나무를 깎는 게 아니다. 명확하지도 않은 나무에서 남들이 못 보는 모습을 찾아내는 능력도 갖춰야 한다.
이들 작품은 나무에 매달리는 혹이다. 나무로서는 ‘암 덩어리’라고 한다. 이런 나무에 포자가 닿으면 버섯을 남기면서 죽고, 춘영 씨와 같은 ‘예술가’를 만나면 이렇게 멋진 작품으로 태어난다. 춘영 님은 죽어가는 나무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그가 여기저기 나눠준 것 가운데 몇 점 안 남은 작품 가운데 눈길을 확 잡아 끄는 게 있다. 집 문 옆을 지키는 두꺼비 모양의 조각이다. 이건 작품이다.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자연과 춘영 님의 예술 혼이 결합한 작품! 보는 순간 장인 정신이 그대로 느껴진다. 작가 스스로 '돈이 될 만한 물건'이다. 그러나 팔 생각은 전혀 없다.

▲ 두꺼비 모양을 한 춘영 목수님 작품. 복을 가져다 주는 느낌이 확 든다.
그의 예술적 솜씨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아버지다. 춘영 님 아버지는 꽤 소문난 솜씨를 가졌었다. 지게, 짚신, 삼태기 등 짚이나 나무로 만들 수 있는 건 모두 만들었다. 생활용품을 만들어 사용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어릴 때부터 만들기를 부담없이 받아들였다.
“아버지의 많은 솜씨 가운데 일부만 물려 받았어요.”
겸손한 그의 솜씨는 단순히 손재주에 머물지 않는다. 생활이다. 30개의 벌통을 관리한다. 한통에 30만 원 하는 고가의 벌꿀을 수십 개 씩 채우는 실력 있는 양봉업자다. 꿀을 키워 꿀벌을 얻으려면 꼭 필요한 게 벌통이다. 춘영 님은 오동나무 벌통을 직접 만들어서 사용한다.
기자가 인정한 그의 솜씨는 ‘미니 지게’다. 기자의 이모님이 기억하는 춘영 님은 '작은 지게를 진짜와 똑같이 기가 막히게 만드는 실력자'이다. 어릴 때 지게 깨나 지어봤기 때문에 잘 안다.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작품’이다. 그냥 미니 지게 같지만, 똑같은 굵기의 싸리나무를 이용해 정교하고, 깔끔하게 만들었다. 튼튼하다. 탐난다. 그런데 하나 밖에 없다. 기회가 되면 꼭 부탁해 봐야지.
그의 솜씨는 직업으로 이어졌다. 그는 ‘솜씨 좋은 목수’다. 매일 출근하며 나무를 다루면서 2천 평 넘는 농사를 짓는 부지런함이 몸에 벤 특별한 목수다. 단순한 목수가 아니라 ‘집 한 채 거뜬히 짓는’ 전문가다. 지금 살고 있는 집도 직접 지었다. 윗 동네 코끼리민박의 황토집도 그의 작품이라고 한다. 두 집의 공통점은 깔끔하고, 효율적이라는 것. 그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 미니 지게. 싸리나무와 노간주 나무로 만들었다. 빈틈없이 꽉 찬 느낌이 든다. 만져보면 탄탄 그 자체다.
어의곡은 그의 고향이다. 초등학교(대곡초) 5학년을 마치고 크게 다쳐 몇 년간 고생했다. 졸업을 3년 후배들과 같이했다. 동창회는 5년간 함께 다닌 또래들 소속이다. 옛날 시골의 많은 사람이 그러했듯 그 역시 20대 초반에 고향을 떠나 도시로 갔다. 부산이다. 이촌향도(離村向都, 농민이 다른 산업에 취업할 기회를 얻기 위해 고향인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동하는 현상)의 한 복판인 1977년의 일이다.
“안 해본 일 없이 했어요.”
생계를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다. 최종적으로 그의 생활을 안정으로 이끈 게 개인 택시 면허다. 이 마을에는 ‘부산에서 택시기사’로 연결된 사람이 꽤 많다. 춘영 씨 영향이 크다. 지금도 아랫마을 개울가에 멋진 ‘신선 펜션’을 지은 오랜 친구는 지금도 개인 택시를 하며 주말이면 귀향해 펜션을 운영한다.
그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1998년. 20년 가까운 타향 생활을 끝냈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부부는 연로한 부모님을 극진히 모셨다. 특히 부인 심재삼 여사는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효부다. 부모님은 자신을 돌본 둘째 아들에게 솜씨와 함께 지금 살고 있는 땅을 물려주셨다.
그가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라’는 말과 함께 자주 외치는 ‘구호’가 있다.
“서울에 가서 살 거야.”
부산에서 서울로. 다시 고향을 떠나고 싶은 건가. 그건 아니다. 이 말을 옆에서 듣던 심 여사가 거든다.
“서울 가면 단 하루도 못살 양반이에요.”
춘영 님은 굳이 부인하지 않는다. 말은 그래도 그는 이곳이 좋다.
누구보다 고향을 사랑한다.
고향에 살면서 아쉬움은 없을까. 있다.
그는 “있는 그대로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런 눈으로 볼 때 사라지는 것 두 가지는 그를 안타깝게 만든다. 그게 뭘까?
“무엇보다 동네 사람들의 정이 자꾸 사라지는 거죠. 전에는 내 것, 네 것 없이 주고 받았는데...”
옛 모습이 갈수록 보기 힘든 게 그를 힘들게 한다. 위 엉어실로 이어지는 도로를 만들 때 기꺼이 자기 땅을 내어놓은 것도 ‘함께하는 삶’을 추구한 결과다. 농촌 소득 증대를 위해 광역 개발이 진행될 때 땅을 내놓아 지금의 <노랑 그네>가 태어났다.
“대부분의 농촌 생활이 그렇듯,
여기서도 돈 벌기가 쉽지 않아요.
돈 벌어야 먹고 사는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사람과 주변이 너무
자기 이익 중심으로 돌아가는 건 안타까워요.”
또 하나는 어의곡을 관통하는 개울물이다.
“그렇게 많던 가재와 물고기를 보기 어려워졌어요.”
지금도 여름철이면 사람으로 가득 차는 깨끗한 골짜기지만, 사라지는 건 어쩔 수 없이 안타깝다. “단양 사람들이 더 깨끗한 물을 먹으려면 상류부터 오염원을 없애야 한다”는 그의 말은 설득력이 있다.
시대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옛날과 비교해서 그렇다는 거지, 어의곡 물은 여전히 맑고 깨끗하다. 어의곡 사람들은 ‘소백산수’(기자가 붙인 이름)를 마신다. 사람이 살지 않은 소백산 깊은 골짜기에서 취수해 산으로 끌어 올려 온 동네에 ‘소백산수’를 공급한다. 단양군에서 실시하는 수질 검사에서는 언제나 ‘합격’이다.
“이 마을에서는 정수기를 쓰지 않아요.
정수기 업체에서 공급을 시도했죠.
수질 검사를 하곤 하나같이 말해요. 정수기가 필요 없다고.”
단양은 물 사정이 그닥 좋지 않다. 시멘트 원료인 석회석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곳 물은 전혀 다르다. 다른 편의 시설은 적극 유치하려 노력하지만, 상수도 시설은 거부한다.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은 나도 좋은 물에 매료된 게 큰 이유다. 어의곡에 오면 꼭 마셔야 하는 게 ‘소백산수’다.
그는 인근 산을 무시로 오르내리며 살아왔다. 위 엉어실에 있는 ‘어의곡 산신령“(산을 잘 아는 친구에게 춘영 님이 붙여준 별명)에는 못 미치지만, 그래도 산에 밝다.
“저기 보이는 뾰족한 세 봉우리, 저게 꼭대기를 오르내렸어요.”
얼핏 봐도 악산이다. 그곳에 오르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선 그에게 산은 그의 스승이다.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었다. 꿀, 능이버섯, 송이버섯, 작품 재료까지. 그의 스마트폰 사진첩은 산이 준 선물로 가득하다. 삶의 교훈을 주기도 한다.
“산에 오르면 자꾸 욕심이 생겨요. 조금 더 가면 송이가 있고, 좀더 가면 능이가 널려있고...”
지금까지는 이 ‘욕심’을 현실로 만드는 큰 어려움은 없었다.
“작년에 생각없이 올라갔다 ‘욕심’을 좀 냈어요.
힘들었지만 평소 코스를 누볐어요.
힘들게 내려왔는데, 그 후유증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어요.”
이를 계기로 평생 유지해온 ‘산 욕심’을 버렸다.
▲ 산 잘 타는 춘영 님의 결실, 능이와 송이. 이렇게 따는 게 힘들어졌다고.
춘영 님은 원칙을 중시한다. 지금도 사리에 어긋나는 일이 있으면 정확히 지적한다.
“어의곡이 좋아요. 사람들이 좋아요.”라는 나의 말에 그는
“겉만 보고 긍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마세요. 잘 살피고 추진하세요.”라고 충고하는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아예 지금 사는 집을 사서 눌러 앉으라”고 권한다.
그렇게 또 한 분의 ‘형님’이 생겼다.
맛있는 저녁 잘 얻어먹고 수다 떨다 보니 캄캄해졌다.
이곳은 일찍 해가 진다.
두 분은 <노랑 그네> 뒤편에 꽤 넓은 밭을 내게 내어 주셨다.
이 밭에서 농사 잘 지어 형님과 형수님께 ‘진상’할 날이 올까.
내일은 부활절 예배 드리고, 단양으로 모종 사러 가야겠다.
글·사진 고운골 박원배 기자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뤄라.”
그동안 듣고 배운 것을 한꺼번에 무너뜨리는 말이다. 이 말만 듣는다면 그는 틀림없이 게으르거나 무책임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 여러 차례 만나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그가 누구보다 책임감 있고, 삶에 진지하다는 것을 잘 알게 됐다.
‘어의곡 아티스트’ 이춘영 님 얘기다.
그의 말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
‘매사를 너무 쉽게, 섣불리 결정하지 말라.
신중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
그래야 후회를 적게 한다.’
내가 이해하는 뜻이다. 실제로 그와 여러 차례 대화하면서 매사에 신중한 태도를 보인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의 말에 날카로움이 담겨 있다는 느낌도 이런 깊은 생각의 결과로 보인다.
그는 개성있고, 창의력이 철철 넘치는 사람이다. 아티스트의 기질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어의곡 아티스트’라는 닉네임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춘영 님은 보는 이를 놀라게 하는 솜씨를 갖고 있다. 그의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솜씨를 칭찬한다. 어느 정도일까.
집안 거실에 있는 작품을 만나 보자.
▲ 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한 짐 되는 나무를 가져다 다듬어야 한다고.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애초
이런 모양으로 돼 있는 것을 깎았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아요.
저런 거 하나 만들려면 한 지게 가득 차는 나무를 짊어지고
힘들게 산을 내려와야 해요.”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까지 힘든 작업을 거친다. 멀쩡하게 산 나무를 깎는 게 아니다. 명확하지도 않은 나무에서 남들이 못 보는 모습을 찾아내는 능력도 갖춰야 한다.
이들 작품은 나무에 매달리는 혹이다. 나무로서는 ‘암 덩어리’라고 한다. 이런 나무에 포자가 닿으면 버섯을 남기면서 죽고, 춘영 씨와 같은 ‘예술가’를 만나면 이렇게 멋진 작품으로 태어난다. 춘영 님은 죽어가는 나무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그가 여기저기 나눠준 것 가운데 몇 점 안 남은 작품 가운데 눈길을 확 잡아 끄는 게 있다. 집 문 옆을 지키는 두꺼비 모양의 조각이다. 이건 작품이다.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자연과 춘영 님의 예술 혼이 결합한 작품! 보는 순간 장인 정신이 그대로 느껴진다. 작가 스스로 '돈이 될 만한 물건'이다. 그러나 팔 생각은 전혀 없다.
▲ 두꺼비 모양을 한 춘영 목수님 작품. 복을 가져다 주는 느낌이 확 든다.
그의 예술적 솜씨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아버지다. 춘영 님 아버지는 꽤 소문난 솜씨를 가졌었다. 지게, 짚신, 삼태기 등 짚이나 나무로 만들 수 있는 건 모두 만들었다. 생활용품을 만들어 사용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어릴 때부터 만들기를 부담없이 받아들였다.
“아버지의 많은 솜씨 가운데 일부만 물려 받았어요.”
겸손한 그의 솜씨는 단순히 손재주에 머물지 않는다. 생활이다. 30개의 벌통을 관리한다. 한통에 30만 원 하는 고가의 벌꿀을 수십 개 씩 채우는 실력 있는 양봉업자다. 꿀을 키워 꿀벌을 얻으려면 꼭 필요한 게 벌통이다. 춘영 님은 오동나무 벌통을 직접 만들어서 사용한다.
기자가 인정한 그의 솜씨는 ‘미니 지게’다. 기자의 이모님이 기억하는 춘영 님은 '작은 지게를 진짜와 똑같이 기가 막히게 만드는 실력자'이다. 어릴 때 지게 깨나 지어봤기 때문에 잘 안다.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작품’이다. 그냥 미니 지게 같지만, 똑같은 굵기의 싸리나무를 이용해 정교하고, 깔끔하게 만들었다. 튼튼하다. 탐난다. 그런데 하나 밖에 없다. 기회가 되면 꼭 부탁해 봐야지.
그의 솜씨는 직업으로 이어졌다. 그는 ‘솜씨 좋은 목수’다. 매일 출근하며 나무를 다루면서 2천 평 넘는 농사를 짓는 부지런함이 몸에 벤 특별한 목수다. 단순한 목수가 아니라 ‘집 한 채 거뜬히 짓는’ 전문가다. 지금 살고 있는 집도 직접 지었다. 윗 동네 코끼리민박의 황토집도 그의 작품이라고 한다. 두 집의 공통점은 깔끔하고, 효율적이라는 것. 그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어의곡은 그의 고향이다. 초등학교(대곡초) 5학년을 마치고 크게 다쳐 몇 년간 고생했다. 졸업을 3년 후배들과 같이했다. 동창회는 5년간 함께 다닌 또래들 소속이다. 옛날 시골의 많은 사람이 그러했듯 그 역시 20대 초반에 고향을 떠나 도시로 갔다. 부산이다. 이촌향도(離村向都, 농민이 다른 산업에 취업할 기회를 얻기 위해 고향인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동하는 현상)의 한 복판인 1977년의 일이다.
“안 해본 일 없이 했어요.”
생계를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다. 최종적으로 그의 생활을 안정으로 이끈 게 개인 택시 면허다. 이 마을에는 ‘부산에서 택시기사’로 연결된 사람이 꽤 많다. 춘영 씨 영향이 크다. 지금도 아랫마을 개울가에 멋진 ‘신선 펜션’을 지은 오랜 친구는 지금도 개인 택시를 하며 주말이면 귀향해 펜션을 운영한다.
그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1998년. 20년 가까운 타향 생활을 끝냈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부부는 연로한 부모님을 극진히 모셨다. 특히 부인 심재삼 여사는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효부다. 부모님은 자신을 돌본 둘째 아들에게 솜씨와 함께 지금 살고 있는 땅을 물려주셨다.
그가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라’는 말과 함께 자주 외치는 ‘구호’가 있다.
“서울에 가서 살 거야.”
부산에서 서울로. 다시 고향을 떠나고 싶은 건가. 그건 아니다. 이 말을 옆에서 듣던 심 여사가 거든다.
“서울 가면 단 하루도 못살 양반이에요.”
춘영 님은 굳이 부인하지 않는다. 말은 그래도 그는 이곳이 좋다.
누구보다 고향을 사랑한다.
고향에 살면서 아쉬움은 없을까. 있다.
그는 “있는 그대로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런 눈으로 볼 때 사라지는 것 두 가지는 그를 안타깝게 만든다. 그게 뭘까?
“무엇보다 동네 사람들의 정이 자꾸 사라지는 거죠. 전에는 내 것, 네 것 없이 주고 받았는데...”
옛 모습이 갈수록 보기 힘든 게 그를 힘들게 한다. 위 엉어실로 이어지는 도로를 만들 때 기꺼이 자기 땅을 내어놓은 것도 ‘함께하는 삶’을 추구한 결과다. 농촌 소득 증대를 위해 광역 개발이 진행될 때 땅을 내놓아 지금의 <노랑 그네>가 태어났다.
“대부분의 농촌 생활이 그렇듯,
여기서도 돈 벌기가 쉽지 않아요.
돈 벌어야 먹고 사는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사람과 주변이 너무
자기 이익 중심으로 돌아가는 건 안타까워요.”
또 하나는 어의곡을 관통하는 개울물이다.
“그렇게 많던 가재와 물고기를 보기 어려워졌어요.”
지금도 여름철이면 사람으로 가득 차는 깨끗한 골짜기지만, 사라지는 건 어쩔 수 없이 안타깝다. “단양 사람들이 더 깨끗한 물을 먹으려면 상류부터 오염원을 없애야 한다”는 그의 말은 설득력이 있다.
시대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옛날과 비교해서 그렇다는 거지, 어의곡 물은 여전히 맑고 깨끗하다. 어의곡 사람들은 ‘소백산수’(기자가 붙인 이름)를 마신다. 사람이 살지 않은 소백산 깊은 골짜기에서 취수해 산으로 끌어 올려 온 동네에 ‘소백산수’를 공급한다. 단양군에서 실시하는 수질 검사에서는 언제나 ‘합격’이다.
“이 마을에서는 정수기를 쓰지 않아요.
정수기 업체에서 공급을 시도했죠.
수질 검사를 하곤 하나같이 말해요. 정수기가 필요 없다고.”
단양은 물 사정이 그닥 좋지 않다. 시멘트 원료인 석회석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곳 물은 전혀 다르다. 다른 편의 시설은 적극 유치하려 노력하지만, 상수도 시설은 거부한다.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은 나도 좋은 물에 매료된 게 큰 이유다. 어의곡에 오면 꼭 마셔야 하는 게 ‘소백산수’다.
그는 인근 산을 무시로 오르내리며 살아왔다. 위 엉어실에 있는 ‘어의곡 산신령“(산을 잘 아는 친구에게 춘영 님이 붙여준 별명)에는 못 미치지만, 그래도 산에 밝다.
“저기 보이는 뾰족한 세 봉우리, 저게 꼭대기를 오르내렸어요.”
얼핏 봐도 악산이다. 그곳에 오르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선 그에게 산은 그의 스승이다.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었다. 꿀, 능이버섯, 송이버섯, 작품 재료까지. 그의 스마트폰 사진첩은 산이 준 선물로 가득하다. 삶의 교훈을 주기도 한다.
“산에 오르면 자꾸 욕심이 생겨요. 조금 더 가면 송이가 있고, 좀더 가면 능이가 널려있고...”
지금까지는 이 ‘욕심’을 현실로 만드는 큰 어려움은 없었다.
“작년에 생각없이 올라갔다 ‘욕심’을 좀 냈어요.
힘들었지만 평소 코스를 누볐어요.
힘들게 내려왔는데, 그 후유증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어요.”
이를 계기로 평생 유지해온 ‘산 욕심’을 버렸다.
춘영 님은 원칙을 중시한다. 지금도 사리에 어긋나는 일이 있으면 정확히 지적한다.
“어의곡이 좋아요. 사람들이 좋아요.”라는 나의 말에 그는
“겉만 보고 긍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마세요. 잘 살피고 추진하세요.”라고 충고하는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아예 지금 사는 집을 사서 눌러 앉으라”고 권한다.
그렇게 또 한 분의 ‘형님’이 생겼다.
맛있는 저녁 잘 얻어먹고 수다 떨다 보니 캄캄해졌다.
이곳은 일찍 해가 진다.
두 분은 <노랑 그네> 뒤편에 꽤 넓은 밭을 내게 내어 주셨다.
이 밭에서 농사 잘 지어 형님과 형수님께 ‘진상’할 날이 올까.
내일은 부활절 예배 드리고, 단양으로 모종 사러 가야겠다.
글·사진 고운골 박원배 기자